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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나에게 양주는 운명이었다.

극해 2023. 11. 13. 14:08

나는 술을 잘하지 못한다. 나는 술이 약하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나는 술자리도 좋아한다. 나는 술과 그 문화를 즐긴다.

어울리지 않는 저 말들은 모두 나이다. 책 아무튼 술을 아껴보고 있지만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아껴보고 있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고 그냥 책 읽는 습관이 아직이라 시간 날 때마다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보고 있다. 책을 다 읽어가는 이 시점에 느끼는 것은 새삼스럽지만 김혼비 작가는 술을 참 좋아한다는 것이다. 글에서 느껴진다. 어쩌면 이 사람은 지금도 취해있을 것이란 것이.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술도 한두잔이면 취해버리고 만다.  내가 술을 제대로 접한 건 대학생 때였는데 여전히 우리나라엔 술 권하는 문화가 강했다. 아니 강요하는 문화였다. 1학년 때 학과장 선배는 술자리에서 글라스로 소주를 마셨고 그 테이블에 앉으려면 나 역시 그렇게 마셔야 했다. 지금은 그런 문화가 잘 없지만 게다가 그땐 "인사"를 하러 나의 술잔, 수저를 가지고 테이블을 돌아야 했다. 수저를 놓고 가면 주인이 누군지 모를 내 앞에 있는 수저를 사용해도 괜찮았지만 술잔을 놓고 가면 "술잔어딨어?"라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선배의 얼굴을 보게 되던 때였다. 술을 못 마시는 나는 항상 1차에 인사를 하던 도중 인사불성이 되어 변기와 친구가 되거나 빠른 귀가를 하곤 했다.
군대를 다녀올 쯔음 그런 분위기로 인한 사고들이 뉴스를 타고 조명되며 그 문화가 조금씩 약해지거나 사라지고 나 역시 선배가 되면서 누가 강요하지 않게 되면서 한잔만 마셔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술자리를 좋아할 뿐 술을 많이 마실 순 없었다.
내 첫 위스키 (그때는 양주라고 불렀다.) 는 조니워커 블랙라벨이었다. 일주일간 모두가 취해서 일하던 농촌활동 중에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다 같이 마시는 그런 날이 있었다. 학생들끼리 모은 돈으로는 매일을 먹고 마시기 힘드니 선배들이 와서 쌀도 사주고 술도 사주는 그런 날이었는데 아마 그날이 내가 처음 양주(위스키, 럼, 데낄라 등등 적당히 40도 이상의 숙성 및 증류한 술을 통틀어서 오늘만 양주라고 칭하겠다. 가짜 술꾼인 나를 포함하여 요즘 술꾼들은 양주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다들 처음엔 양주라고 불렀을테니...)를 만난 날이었을 것이다. 그전에 마시던 소주나 맥주는 잔을 들고 따라다니며 마셔야하는 술이었는데 양주라는 술은 너도 나도 모두  딱 한잔만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더 강요하지도 더 권하지도 않는 딱 한잔. 양주는 마시면 목이 아프고 내 뱃속 장기들이 어떤 모양으로 들어있는지도 알 것 같은 왜 마시는지 모를 술이었지만 술 권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당시 내가 보기에는) 안마신다고 하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술이었다. 그렇게 양주를 처음 만났다.
양주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잘 맞는 술이었다. 소주나 맥주를 마실 때는 내 그만이라는 말에 아쉬워하던 친구들이 양주를 함께 마실 땐 내 그만이라는 말을 좋아했고 술을 못 마시지만 좋아하는 나에게는 소위 "알성비"가 좋았다.

양주의 높은 도수는 알성비도 좋지만 유통기한도 거의 무한정 늘려준다. 와인처럼 도수가 낮은 술은 코르크마개를 열고나면 보통 1~2주 안에 해결해야하지만(물론 술꾼들에게는 술에게 보관이라는 단어만큼 어색한게 없겠지만) 양주는 한잔마시고 뚜껑을 닫아 그늘진 곳에 잘 놓아두면 몇년을 마셔도 똑같은 맛이 유지된다.(오히려 에어링으로 더 마시기 편해지기까지 한다.)
어디 가서 허세를 부리기도 좋다. 약한 도수로 즐기고 싶다면 하이볼로 마시기도 좋고 몇 가지 추가 재료만 있으면 칵테일로 더 다양하게 즐기기도 좋다. 마시던 술을 들고나가도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로 나는 양주와 사랑에 빠졌다. 다만, 장거리연애같을 뿐...(나는 달에 한번정도 술을 마시고 딱 한잔만 마신다.)
오늘도 나는 술장의 술들을 눈으로 마시고 조만한 한잔해야지! (단어 그대로 한잔이다.) 라고 생각만 하며 하루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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